[]산돌에는 다양한 타입(Type)의 디자이너들이 있다.

글자의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Type eXperience Designer


다가오는 2024년은 산돌에게 의미 있는 해입니다. 설립된 지 40년이 되었고 폰트 구독 서비스인 산돌구름 런칭 10년이 되는 해거든요. 산돌이 4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폰트”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내부 구성원들이 폰트가 개인과 공동체, 나아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믿기 때문일 거고요.

오랜 세월을 지나, 한국 폰트 시장은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어요. 이에 따라 폰트 디자이너의 활동 영역도 넓어지고 있습니다. 점점 일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확장되고 있다고 할까요? 산돌에도 다방면의 영역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들이 있어요. 다채로운 타입(Type)의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일하고 있고, 어떤 영역에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려고 해요.
*아래부터는 타입, 폰트, 글꼴, 글자 등의 용어를 폰트로 통일해서 사용할게요.



들어가며

저의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2019년 산돌에 폰트 디자이너로 입사했습니다. 당시 산돌은 [폰트 사용범위 통합 캠페인]이나 [무료폰트 서비스] 등의 굵직한 일을 전개하며 ‘플랫폼’으로서 역할을 강화했어요. 이에 따라 폰트 디자이너들은 다양한 폰트 브랜드와 직접 소통을 하고 있었고, 신규폰트와 기획상품 등을 관리하는 큐레이터 혹은 MD의 역할까지 더해졌어요. 처음에는 “폰트 디자이너인 내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현타가 자주 왔어요. “폰트 디자이너는 폰트만 잘 만들면 되는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쉽게 폰트를 사용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는 제가 있었어요. 이런 질문과 딜레마 속에서, 이윽고 폰트를 잘 만드는 것 외에도, 폰트를 알기 쉽게 소개하고 디자이너의 시각을 곁들여 차별화된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디자인을 처음 배울 때, 스스로 본인을 어떤 사람인지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배웠어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세상의 다양한 폰트를 경험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이를 위해서 폰트를 직접 제작할 수도, 플랫폼에 입점한 브랜드사와 함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겠죠. 또 현재 하고 있는 것처럼, 타입디자인그룹에서 기업 클라이언트를 만나 폰트를 소개하고 협업할 수 있는 접점을 만들기 위한 일을 할 수도 있을 거고요!



폰트 시장의 변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폰트 디자이너의 역할이 확장된 주된 이유는 폰트 시장이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첫번째 변화는 폰트 클라우드 서비스의 런칭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양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폰트를 다운로드하는 방식(CD, 디스크 등)에서 벗어나, 폰트를 사용하는 방식과 경험*이 완전히 달라졌죠.
*과거 많은 사용자들에게 익숙했던 다운로드 방식은 폰트 불법 복제 문제가 심각했고, 사용하고자 하는 PC에 매번 다운로드해야하는 불편함이 있었어요. 2014년 폰트 클라우드 서비스 산돌구름을 시작으로, 폰트 불법 복제가 방지되고 사용자들은 필요할 때 쉽고 합리적으로 폰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변화는 사용자들이 CJK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수 문화권의 언어를 포함한 통합된 폰트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산돌은 IBM 프로젝트를 통해 CJK를 통일된 시각에서 효율적으로 제작하는 노하우를 익혔어요.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언어권의 디자이너와 협업하며 디자인적으로나 기술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네트워크도 확장했고요. 

그 외에도 IT업계 시장의 변화(AI의 등장) 또한 폰트 업계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예측하고 있어요. 더 빠르고 정확하게 폰트를 다룰 수 있는 기술들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고 이는 폰트 업계를 급격하게 바꿀지도 모릅니다.

어떤 시장이 확대되거나 변화하면서 다양한 직무가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변화에 반응하여 자연스럽게 자신을 재정의하고 확장해 나가는 폰트 디자이너입니다.



폰트 디자이너는 어떻게 일해요?

회사 안에서 저와 비슷한 고민을 했을 디자이너들을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직접 공감하고 싶었습니다. 총 세 명의 폰트 디자이너를 만나 가벼운 인터뷰를 진행했어요. 공통 질문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진 않았는지, 확장하고 있는 폰트 디자이너에 대한 의견과 앞으로의 폰트 디자이너의 역할은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Type1. 폰트 디자인부터 콘텐츠 기획까지

Q. 피디님, 안녕하세요.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산돌에 입사한 지 4년 차인 폰트 디자이너 김민정입니다. 2019년에 폰트 디자이너로 입사했고요, 폰트 디자이너가 안 할 만한 일도 많이 했어요.

미팅룸 '달'에서 김민정 PD와 만났다.


Q. 현재는 산돌구름팀에 있고 과거에는 다양한 업무를 하신 걸로 알아요. 어떤 업무를 했는지 소개해 줄 수 있나요?

A. 입사 후에 1년 정도 폰트를 만들다가 모바일 시장이 확대되면서 모바일 상품 기획 업무를 맡게 되었어요. 담당자가 된 이후로 자연스럽게 모바일 앱의 기획과 함께 모바일 플랫폼 운영을 했어요. 추가로 브랜드사 관리 부분과 모바일 앱에 필요한 관리자(어드민)페이지 등의 기획에 참여했습니다. 이때부터 산돌구름에 다양한 브랜드사들이 다수 입점하기 시작했고 판매하는 상품 또한 개편되거나 신설되는 상황이었다 보니 브랜드사 관리, 상품 등록 및 판매, 정산까지 거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게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내고 지금은 기획 운영팀 폰트 디자인 파트로 소속되어 산돌구름에 들어가는 산돌 폰트와 모바일 폰트를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Q. 폰트 디자인에서 서비스 기획으로 다시 폰트 디자인팀으로. 4년 동안 제일 큰 변화를 겪으신 분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어떤 생각으로 일을 했는지 궁금해요.

A. 모바일을 집중해서 담당하게 된 것은 타의에 따른 게 컸어요. 모바일 담당자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제가 유일하게 조금 흥미가 있었던지라 담당자가 되었죠. 그렇다 보니 회사 내에 모바일에 대한 흐름을 잘 아는 사람이 되었고 모바일 앱 담당자가 되어 서비스 기획팀까지 가게 되었어요. 기획 업무의 경우 팀내  기획자분께 많이 물어보고 함께 고민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성우 피디님하고 같은 팀이었잖아요. 근데 이게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싶은 거예요. 시간이 정말 빨리 갔어요. 타임라인으로 정리해 보면 21년 11월에 플랫폼비즈니스팀이 신설되고 2022년 3월에 산돌 웹페이지가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관리자 페이지도 개편되었고, 2022년 9월에 모바일 앱이 오픈했더라고요.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네요.

 

Q. 민정 피디님은 플랫폼비즈니스팀에서 신설된 콘텐츠 기획팀 팀장님도 하게 되셨어요.

A. 제안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거절했어요.(사실 끝까지요..!)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제가 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거든요. 팀장을 하다 보니 팀원을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고, 그 부담 때문인지 몰라도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할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팀원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니까요. 팀원이 하고 싶은 일 또는 하고자 하는 일을 파악해서 우리 팀 방향과 함께 갈 수 있게끔 도와줘야 하니까 팀 케미스트리를 극대화할 방법 등을 고민했던 것 같아요.

 

Q. 기획팀에 있다 보면 폰트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하고 일할 수밖에 없잖아요. 폰트 전문가의 시선으로 프로젝트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 된 건데, 이런 환경의 변화를 겪으면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A. 팀이 바뀌고 업무 롤이 바뀌면서 폰트 디자이너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나는 폰트 디자이너인데 다른 업무를 해야 하니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나는 기획자인가 운영자인가 디자이너인가. 그러다 보니 불안함도 생기고 생각보다 길게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또 다른 사람들에게 나 뭐 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때 어려웠어요. ‘나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와 '더불어 다른 사람들은 나를 뭐라고 정의할까'이런 고민이 힘들었죠. 폰트 디자인을 놓으니까, 트렌드라든지 이슈 같은 것도 조금 놓치게 되는 것 같고요. 애매한 포지션이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산돌이라는 조직에 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가능한 것 같기도 해요. 또 폰트의 특성도 한몫하는 것 같고요. 조직의 가장 큰 ROI가 폰트인데 폰트에 대한 것은 폰트를 그려본 사람이 제일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폰트 디자인이 메인 디자인 씬에 포지셔닝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메가 트렌드라고 볼 수도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폰트 디자이너가 아니고서야 폰트에 대해서 잘 알 방법이 없다고 해야 할까? 폰트 디자이너들은 폰트에 관심이 많으니까 숨 쉬듯이 폰트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데, 그렇지 않고선 그렇게까지 폰트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봐요. 그러니까 폰트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폰트에 대해서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해요.

두 번째로 폰트 회사에서 플랫폼 운영이든 브랜드사와의 소통이든 상품을 기획하거나 큐레이팅 할 때도 결국 이 폰트에 대해서 제일 잘 알아야 하는 거잖아요. 폰트 디자이너가 명확하게 잘할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어요. 회사 내에서도 폰트 디자이너가 어떻게 보면 가장 빠르게 투입이 가능한 인력인 것 같고, 최대의 효율과 효과를 낼 수 있으니 폰트 디자이너를 키우는 방향이 더 효과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그러니까 결국에는 이러한 현실적인 변화 때문에 폰트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다양해졌다고 생각해요.

김민정 PD는 모바일기획, 콘텐츠기획 등의 팀을 거쳐, 현재는 다시 폰트디자인을 하고 있다.


Q. 시작은 타의에 의해서, 시장의 변화에 의해서 우리의 역할이 달라졌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이렇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잖아요. 정체성 시프트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적응을 우리 스스로 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앞으로 폰트 디자이너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A. 앞에서 말씀드린 것은 환경적인 변화에 대해서 집중해서 이야기했다면, 저는 폰트 디자이너 개개인의 선택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획이라든지 운영이라든지 갑자기 그런 업무들이 주어졌을 때 그 업무에 흥미 있어 하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성우 피디님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폰트 외에도 (폰트를 매개로) 다른 것에도 관심이 있었고 흥미가 있었기 때문이잖아요. 결국 내 정체성과 자기다움은 나 스스로 정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역할의 한계도 스스로 정하는 것이고요. 폰트 디자인 하나만 했을 때보다 에너지나 관심이 분산되는 점도 있지만 다른 관점으로 폰트를 바라볼 때 분명 시너지가 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반인반수(?) 느낌으로 폰트를 기반으로 여러 무기를 개발하고 싶어요. 힘들지만 뭐든 할 수 있어요. 여러분, 용기를 가지세요.



Type2. 디자이너가 비지니스팀 팀장을 맡았다.

Q. 민재 피디님, 간단한 소개를 부탁드려요.

A. 적지 않은 시간 동안(10년 정도) 산돌에서 폰트 디자인을 해왔는데요. 최근에는 폰트 디자인뿐 아니라 폰트 컨설팅을 하는 업무도 맡고 있어요. 폰트 컨설팅은 기업에서 폰트 개발에 대한 문의가 왔을 때, 문의 대응을 하면서 기업에 필요한 제안을 하고 프로젝트를 잘 완수하기 위해 기업과 함께 고민하는 업무라고 생각하면 좋겠어요. 과거에는 폰트 디자인에 열중하면서 재미와 가치를 느꼈다면 최근에는 고객사와 그와 관련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서 흥미와 가치를 느끼고 있습니다.


미팅룸 '우주'에서 강민재 PD를 만났다.


Q. 진행한 프로젝트 중에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소개해주세요. 또는 가장 애정이 가는 프로젝트요.

A. 첫 번째로 리디(RIDI)에서 제작한 「리디바탕」이 떠오르는데요, 저에게 의미가 있는 프로젝트였어요. 과거에 해왔던 디자인적 방법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적용했던 프로젝트에요. 리디 페이퍼를 쓰는 사용자들이 글을 잘 읽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작은 크기의 글자 테스트와 연구를 깊게 진행했어요. 이 프로젝트로 디자인 실력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크게 성장할 수 있어서 기억에 남아요. 

두 번째는 슈퍼셀(SUPERCELL)이라는 게임 회사의 클래시 오프 클랜(Crash of Clans) 게임에 들어가는 폰트 개발을 들 수 있겠어요. 제가 게임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이 프로젝트의 PM을 맡았을 때 라틴 폰트를 한글로 로컬라이징하는 과정 자체에 흥미를 갖고 있던 터라 작업 자체로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있어요.

전부 세어보니까 10년 동안 약 20개의 커스텀 프로젝트를 진행했더라고요.

 

Q. 와, 이거는 정말 아무나 내세울 수 없는 포트폴리오인 것 같아요. 그만큼 내공도 쌓였을 것 같고요. 그렇게 10년 동안 폰트 디자인에 몰두해 있다가 새로운 팀이 만들어지고 팀장님으로서 한 팀을 이끌게 됐어요. 그 과정을 소개해 주세요.

A. BM이라는 포지션이 생긴 것부터 설명해야겠어요. BM은 Business Manager를 줄인 말인데요, 과거에는 비즈니스를 전담하는 부서가 있었는데, 그 부서가 타입 디자인팀으로 통합되면서 업무도 자연스럽게 커스텀팀(기업 브랜드 전용폰트를 관리하는 팀)으로 흡수되었어요. 2019년, 2020년 그 사이였던 것 같아요.

당시에 제가 커스텀팀의 팀장이었는데 비즈니스 관련 업무가 자연스럽게 팀장의 역할이 되었죠. 자연스럽게 되어 버려서 그냥 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음먹고 이렇게 하겠다 결심해서 시작했다기보다는 업무가 흡수되었기 때문에 하게 되었고,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새도 없었어요. 여러 고객사를 만나러 다니고 숫자를 보고, 견적을 내면서 숫자와 조금씩 친해지게 되었어요.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새로운 업무에 재미를 느꼈어요. 사람 만나는 것도 되게 좋아하거든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한다는 것은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나 지식 등을 나누고 공유한다는 걸 좋아한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고객사들을 만나서 폰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을 듣고 그 고민에 맞는 제안을 하면서 행복해하는 저를 발견하기도 했죠.

 

Q. 자의든 타의든 시장과 회사의 환경, 상황에 맞게 피디님의 롤이 바뀐 것 같아요. 혹시 그 과정에서 고민은 없었나요? 

A. 위에서 혼란을 느낄 새도 없다고 했는데, 마음 한편으로 불편함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에요. 과거에는 폰트 스케치, 드로잉, 제작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꼈는데 이 부분의 비중이 줄어들게 되니 심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거기서 또 새로운 재미를 찾게 되었고, 더 진행하다 보니 새로운 방향의 업무도 오히려 좋을 수 있겠다 싶었죠.

폰트 디자인에만 집중하는 것이 한 우물을 깊게 파는 과정, 집중된 시야를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면 제가 한 업무는 사고력을 바탕으로 넓게 펼쳐진 시야를 가질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한 가지 시야를 갖는 것보다 두 가지 세 가지 시야로 폰트와 이 시장, 업계를 바라보았을 때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었어요. 폰트를 매개로 사람에 대한 이해도 좀 더 넓어질 수 있었고요. 결국 폰트를 사용하는 것도 사람이고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도 사람이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기술이 과거에 비해 더 노련해진 것 같아요.

 

Q. 맞아요. 성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폰트 디자인에 심취해 깊게 파는 장인 같은 디자이너도 멋지고, 민재 피디님처럼 폰트를 베이스로 새로운 무기를 장착해 나가는 것도 멋진 것 같아요. 저는 이렇게 생각을 전환하고 확장하는 것은 우리가 산돌이라는 회사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어찌 보면 산돌이 새로운 영역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계속 필요로 하는 거죠.

A. 완전히 동의해요. 회사라는 조직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경험하는 것이 분명히 있어요. 산돌뿐만 아니라 어떤 회사여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봐요. 요즘에는 하이브리드로 여러 직군의 사람들이 다양한 부서와 환경에 적응해야 하잖아요. 낯선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나 필연적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조직 생활의 이점이기도 하고요. 혼자 일하는 것에 비해 다른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 소신을 이야기하자면 IT 업계, 시장 변화가 폰트 쪽에도 영향을 미칠 거라고 봐요. 모든 산업 전반에 걸쳐서 제작의 비중이 축소되고 간소화되고 있고 대체 가능한 기술이 생기고 있잖아요. 대표적으로 AI! 이미 AI로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것까지 가능해졌잖아요. 폰트 제작도 드로잉 부분에서는 대체 가능한 기술이 곧 나올 것으로 생각하는 거죠. 그렇다면 ‘내가 더 집중해야 할 부분은 어디인가’ 생각할 때 폰트 제작 외의 다른 부분일 것 같아요.

강민재 PD는 낯선 상황과 만나는 것이 조직 생활의 이점이라고 설명했다.


Q. 맞아요. 와 많은 이야기를 깊게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이게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아요. 요즘엔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시나요? 최종적으로는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으세요?

A.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랫동안 제작 위주의 폰트 디자인을 하다가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 성장했다고 이야기했는데 추가로 어떤 지점에서 성장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어요. 구체적인 그림은 아직 그리고 있고요. 그리고 후배 디자이너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폰트 디자인에 더 깊이 있게 들어가고 싶다면 그 방향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고, 또 다른 무기를 갖고 싶은 디자이너가 있다면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행복을 함께 느끼고 싶어요. 그러한 기반을 닦는 선배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Type3. 개자이너(개발자 + 디자이너)가 뭔가요?

Q. 안녕하세요. 팀장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저는 산돌 타입디자인그룹 타입랩팀 팀장 임창섭입니다. 어느덧 7년 차에 접어들었네요.

미팅룸 '별'에서 만난 임창섭 팀장.


Q. 지금 팀장님의 업무를 소개해 주세요.

A. 폰트 디자인 업무와 함께 디자인된 폰트를 디바이스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파일화 및 최적화하는 작업(제너레이트)과 폰트 관련 연구 업무를 함께 맡고 있습니다.


Q. 처음 폰트 디자이너로 입사해서 커스텀 업무로 일을 시작한 거로 알고 있어요. 그러다가 개발자 + 디자이너의 포지션을 잡았고, 타입기술팀이 구성되고 팀장이 되는 히스토리가 있잖아요. 그 히스토리를 들려주실 수 있나요?

A. 결론적으로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진행됐어요. 타입기술팀이 꾸려지기 전부터 글립스(폰트 제작 프로그램)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오류가 생겼을 때 스스로 코딩하면서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러다 보니 다른 폰트 디자이너들이 폰트에 대해서 저에게 질문하고 제가 답변을 해주는 경우가 많았고요. 또 제너레이트도 관심이 있어서 회사 밖 학원에서 따로 시간을 내 수업을 듣기도 하고 직접 해보기도 했어요. 그런 와중에 제너레이트 업무가 타입디자인그룹으로 이전되면서 팀장 제의가 들어왔고, 그 팀을 제가 맡게 되었어요. 팀의 메인 롤은 폰트 제너레이트였고, 폰트를 제작할 때 필요한 플러그인이나 스크립트를 제작하는 업무까지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Q. 스스로 본인의 관심사를 알고 있었고, 공부도 하시면서 준비하는 과정에서 팀이 딱 구성되었네요. 회사의 환경이 변화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자+폰트 디자이너의 길을 걷게 되었어요. 혹시 그 과정에서 혼란스러움이나 어려움은 없었나요?

A. 이게 주기적으로 오는 것 같아요. 이런 고민을 하는 시점은 본인이 하는 업무에 불만이 생겼을 때라고 보거든요. 제너레이트와 개발 업무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디자이너로서의 성장과 경험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쩔 수 없이 팀을 담당하게 되면서 당연히 폰트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게 되고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앗, 이게 맞나?’ 생각하는 시기도 있었어요. 그런 고민이 들 때마다 내가 목표로 하는 바가 무엇일지를 더 명확하게 했던 것 같아요. 어느 정도는 나 스스로 내린 선택이기 때문에, 멀리 봤을 때 지금 하는 새로운 업무가 어떤 경험치로 적용할 수 있을까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Q. 또 한 번 업무에 변화가 생겨요. 타입기술팀에서 타임랩팀의 팀장을 맡으면서 폰트 개발 외에 연구 팀원도 생기고 산돌구름 폰트를 제작하는 팀원도 생겼어요. 이게 저는 확장된 개념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어떠셨나요?

A. 팀이 확장되고 본격적으로 인력 관리를 하게 되면서 제가 연구에도 참여하게 되고 산돌구름 폰트 제작에도 관여하게 되었죠. 제너레이트와 연구, 폰트 디자인 업무를 병행하다 보니 처음 겪어보는 업무에서 오는 부담감도 있었고, 성격이 너무 다른 여러 업무들을 겪으면서 정체성의 혼란도 있었어요.

업무의 특성상 제너레이트 및 개발 업무는 모니터 화면만 하루 종일 바라보며 일하다 보니 말을 한 마디도 안 하고 일하는 경우도 있는데, 연구 업무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논의, 조율하는 일이 주로 이루어지다 보니 하루 종일 이야기해야 하거든요.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업무를 병행하다 보니 매일매일 감정의 텐션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지치는 경우가 있었죠. 특히 ‘연구는 해본 적도 없는데 내가 연구에 참여해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죠. 그래서 당시에 그룹장님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업무의 방향성을 제대로 수립하고 나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어요. 지금에 와서는 제가 이 업무들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면서 좀 더 담담하게 업무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Q. 네, 정말 긴 터널을 지나왔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우리가 산돌이라는 조직 안에 속해 있기 때문에 업무에 대한 변화뿐만 아니라 정체성의 변화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의견이 궁금해요. 시장의 변화, 그에 따른 디자이너의 변화 및 확장이 일어나고 있고 팀장님도 그 선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A. 저는 디자이너의 변화와 확장에 있어서 긍정적인 부분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해외에는 이미 디자이너 겸 개발자인 분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잖아요. 글립스 프로그램 개발한 사람도 실제 디자이너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가 처음 폰트 디자인이라는 분야에 발을 들였을 때 느꼈던 건 유독 한국 시장은 벽이 쳐져 있다고 해야 할까요? 폰트 디자이너는 디자인만 할 수 있는 사람, 제너레이트나 기술 개발은 완전 개발자의 일 이런 구분이 명확한 것 같더라고요. 당시엔 이런 구분이 폰트 시장을 더 좁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현재는 이렇게 저렇게 확장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말이에요. 디자이너의 입장에선 시도할 수 있는,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는 거니까 충분히 긍정적이라고 생각해요.


Q. 폰트 디자이너의 두 개 방향 모두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폰트를 깊게 파는 것도 그것 나름의 의미가 있고 확장의 시도도 디자인의 깊이는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다양한 환경을 접해보는 것이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꽤나 중요하잖아요.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해요.

A. 네, 디자인 분야만 봤을 때 AI나 신기술이 발전하면서 디자인의 많은 부분이 대체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보이잖아요. 그런데 폰트는 1차원적인 디자인이다 보니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디자이너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특히 한글 폰트 디자이너는 더더욱이요. AI가 어디까지 대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AI가 할 수 없는 분야가 폰트 디자인에 충분히 있다고 보거든요. 검수 과정이라든지 시각적인 예민함을 기반으로 하는 보정, 이슈 등은 AI가 대체하기 쉽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임창섭 팀장은 기술이 발전해도 AI가 대체할 수 없는 폰트 디자인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Q. 그렇다면 폰트 디자이너의 역할 같은 게 있을까요?

A. 폰트는 디자인의 영역에서 물감 같은 도구잖아요. 이 물감이 더 좋은 색을 내고, 어디에든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만드는 게 폰트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장인같이 폰트의 질을 높이는 것이 하나의 방향성일 것 같고요. 개발이나 마케팅 등의 다른 영역과 합쳐져서 새로운 시너지를 만들어 내고 이 시장에서 새로운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폰트를 이용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도 폰트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산돌에서도 밖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내부에서도 지속적으로 뭔가 시도하잖아요. 예를 들면, 산돌에서 작년에 출시했던 ‘배리어블 넘버스’ 프로젝트는 배리어블이라는 기술을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고 사용자들에게 제안할 수 있었던 좋은 사례라고 생각해요. 


Q. 진짜요. 개인적으로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요.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으세요?

A. 한 1년 반 전에는 그게 정해져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폰트와 개발 쪽에서 자리를 잡고 두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은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있어요. 그 둘을 양립해서 진행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더불어 이것만으로 특별한, 대체 불가능한 영역은 아니라고 보기도 하고요. 또 다른 무기가 더 필요하지 않을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뭔지는 아직 못 정했어요. 지금은 지금 업무에 적응하느라 조금 바쁜 상황이고 어느 정도 정해지면 그때 또 뭔가 고민을 하지 않을까 싶네요.



나가며

산돌에는 다양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폰트 디자이너가 곳곳에 있어요. 물론 다양한 업무를 하는 전문가 동료들이 있지만 특별히 폰트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더 섬세하고 뾰족하게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자의든 타의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자신의 모습을 바꿔가는 것이 때론 혼란스럽고 답답한 일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이름 짓는 다채로운 타입의 폰트 디자이너를 주목하고 싶고, 우리 모두를 응원하고 싶어요. 

저는 산돌에서 일하는 폰트 디자이너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어요. 글자를 통해서 사용자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는 Type eXperience Designer 라고요. 결국, 우리의 역할은 폰트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사용자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고, 좋은 폰트를 쓸 수 있게끔 소개하고 만들며 도와주는 것에 있는 것 같아요. 

컴퍼니(company·기업·회사·조직·공동체)의 어원은 라틴어로 함께(cum) 빵(panis)을 나눠 먹는다는 뜻이라고 해요. 저는 여기에서 ‘함께’라는 단어에 더 주목하고 싶어요.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모여 더 나은 삶을 고민하는 것, 산돌이 40년을 유지해 온 저력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배성우
타입디자인팀
글자를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경험의 가치를 공유·공감하고,
이를 바탕으로 디자인하는 Type eXperience Designer.